
[서울타임즈뉴스 = 최남주 기자] 전국 사업장 안전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대기업 총수의 책임경영 문제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이 대부분 대표이사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진 총수의 책임 범위를 둘러싼 논의도 커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총수의 등기이사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은 삼성그룹 총수이지만 삼성전자 이사회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반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 등 주요 계열사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같은 대기업 총수지만 한쪽은 미등기, 다른 한쪽은 등기이사다.
과거에는 총수가 핵심 계열사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커지고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산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여기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주주권 강화 흐름까지 겹치면서 등기이사는 권한뿐 아니라 책임까지 함께 지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리더스인덱스 자료에 따르면 자산 5조원 이상 주요 기업집단 가운데 미등기 총수는 14명이다. 이중 공정거래위원회 자산 순위 50대 그룹에 포함된 총수는 삼성 이재용 회장, 신세계 이명희 총괄회장, CJ 이재현 회장, DL 이해욱 회장, 한국앤컴퍼니그룹 조양래 명예회장, DB 김준기 창업회장, 이랜드 박성수 회장 등 7명이다.
이들은 그룹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로 평가받지만 어느 계열사에서도 등기이사를 맡고 있지 않다. 경영 전략과 투자, 인사와 조직 개편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이사회 의결권과 법적 책임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특히 삼성의 경우 전문경영인 체제를 대표하는 사례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한종희 부회장과 전영현 부회장 등 전문경영진이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을 이끌고 있으며, 이재용 회장은 그룹 차원의 미래 전략과 대규모 투자,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의 경우 미등기 상태를 단순히 책임 회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 회장은 2016년까지 삼성전자 등기이사를 맡았지만 국정농단 사건 이후 임기 만료와 함께 이사회에서 물러났다. 이후 경영 복귀 과정에서 등기이사 선임 가능성이 여러 차례 거론됐지만 실제 주주총회 안건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사법 리스크가 장기간 이어진 데다 글로벌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삼성은 전문경영인 중심의 이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이 회장은 그룹의 투자와 미래 전략을 총괄하고 전문경영인이 이사회 운영과 법적 책임을 맡는 역할 분담 구조가 자리 잡았다.
삼성만의 사례는 아니다. CJ 이재현 회장과 DL 이해욱 회장 역시 그룹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로 평가받지만 주요 계열사 등기이사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투자와 사업 재편, 신성장 전략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이사회 운영과 법적 책임은 전문경영진이 맡는 구조다. 재계에서는 이를 권한과 집행을 분리한 전문경영인 중심 모델의 확산으로 해석한다.
반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 등 주요 계열사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며 미래차와 전동화,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주요 투자와 인수합병(M&A), 신사업 추진 과정에서도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같은 총수라도 삼성은 전문경영인 중심의 책임 분산형 모델을, 현대차는 총수 중심의 책임경영 모델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두 그룹이 책임경영과 지배구조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의선 회장처럼 책임경영을 강조하며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는 총수들은 적지 않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은 주요 계열사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투자와 인수합병, 신사업 진출, 대규모 자금 집행 등 핵심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등기임원 겸직 수를 보면 차이는 더욱 뚜렷하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16개 계열사에서 등기임원을 맡아 가장 많았고 우오현 SM그룹 회장은 12개 계열사에 이름을 올렸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과 정몽규 HDC그룹 회장은 각각 5개 계열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4개 계열사에서 등기임원을 맡고 있다.
특히 건설·개발 중심 그룹의 높은 겸직 비중은 눈여겨볼 만하다. 부영과 SM, HDC, 중흥 등은 시행과 시공, 개발사업, 자산관리 법인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업 특성상 총수의 직접 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많고 의사결정 역시 오너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총수들이 등기이사를 맡는 이유는 경영 판단에 대한 권한을 공식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서다. 투자와 인수합병, 사업 재편, 대규모 자금 집행 등 주요 안건은 이사회를 거쳐야 한다. 등기이사는 의결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함께 부담한다.
주주와 시장을 향한 신뢰의 메시지라는 의미도 있다. 등기이사는 상법상 충실의무와 선관주의 의무를 지며 경영 실패나 법 위반이 발생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다. 국민연금과 기관투자자들이 총수의 등기임원 참여를 꾸준히 요구해 온 것도 권한과 책임의 일치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재계의 흐름은 달라지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최고경영진이 부담해야 하는 법적 책임 범위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수가 맡고 있는 등기임원직 수는 2020년 117개에서 올해 100개로 줄었다. 5년 새 14.5% 감소한 수치다.
상법 개정과 ESG 경영 확산 역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주주권 강화 흐름 속에서 이사회 구성원이 부담해야 할 책임은 과거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총수 입장에서는 책임경영 요구와 법적 리스크 관리 사이에서 선택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재계에서는 책임경영 요구와 법적 리스크 관리 사이에서 총수들의 선택이 계속 엇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등기 총수와 미등기 총수의 공존 역시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재계 한 관계자는 “등기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권한을 공식화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며 “결국 중요한 것은 등기 여부 자체보다 기업이 권한과 책임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고 있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