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타임즈뉴스 = 서연옥 기자] 건설업계가 긴 침체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주택 경기 회복은 예상보다 더디고 공사비 부담은 여전하다. 대형 건설사들마저 외형 성장보다 생존과 수익성 확보에 무게를 두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부회장 취임 100일을 맞은 박상신 DL이앤씨 대표의 성적표에 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박 부회장의 첫 100일은 공격적인 확장보다 체질 개선에 가까웠다. 매출 규모보다 수익성, 수주 규모보다 현금흐름, 외형 성장보다 안전경영을 우선순위에 놓았다. 건설업 불황기일수록 얼마나 많이 수주했느냐보다 얼마나 남기는지가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성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DL이앤씨의 올해 1분기 연결기준 매출은 1조725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6% 감소했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1573억원으로 94.3% 증가했고 당기순이익은 1601억원으로 429.4% 급증했다. 외형은 줄었지만 이익 체력은 눈에 띄게 강화됐다.
박 부회장은 DL그룹 건설 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건설통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지난 1985년 삼호에 입사한 뒤 개발사업과 경영혁신 업무를 거쳤고 고려개발 대표, 대림산업 주택사업본부장, 건설사업부 대표 등을 역임했다. 주택사업과 재무, 조직 혁신 경험을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경력은 위기 극복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삼호 경영혁신본부장 시절에는 사업성 평가를 강화하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며 워크아웃 조기 졸업을 이끌었다. 대림산업에서는 영업이익 1조원 시대를 열며 경영 능력을 입증했다. 하이엔드 주거 브랜드 아크로(ACRO) 리뉴얼을 주도하며 브랜드 경쟁력을 끌어올린 것도 박 부회장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이번 1분기 실적 반등의 핵심은 원가율 개선이다. DL이앤씨 주택 부문 원가율은 2024년 1분기 93.0%에서 올해 1분기 79.9%까지 낮아졌다. 연결 기준 전사 원가율 역시 90.4%에서 84.7%로 개선됐다. 건설사 수익성을 좌우하는 원가 관리가 성과를 내면서 실적 회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수주 전략 역시 달라졌다. 압구정·목동·성수·여의도 등 서울 핵심 정비사업과 플랜트, 에너지 분야 고부가가치 사업에 집중했다. 그 결과 올해 1분기 신규 수주는 2조126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9.3% 증가했다. 무조건 물량을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수익성과 사업성을 따지는 선별 수주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모든 승부가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올해 상반기 건설업계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던 압구정5구역 재건축 수주전은 박 부회장에게 또 다른 의미의 시험대였다. 그는 직접 조합원들을 만나 사업 비전을 설명하며 수주전에 힘을 실었지만 최종 선택은 현대건설로 향했다.
압구정5구역은 단순한 정비사업이 아니다. 강남 재건축 시장의 상징이자 향후 압구정 전역 수주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 평가받는다. 박 부회장이 직접 전면에 나선 것도 그만큼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아쉬운 패배였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수주전이 박 부회장의 경영 철학을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도 내놓는다. 브랜드 경쟁과 조건 경쟁이 과열되는 상황에서도 무리한 조건 제시보다 사업성 검토와 수익성 원칙을 유지하는 데 무게를 뒀기 때문이다. 압구정 수주 실패는 단기적으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향후 서울 핵심 정비사업 시장에서 어떤 차별화 전략을 보여줄 것인지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DL이앤씨의 재무 안정성은 오히려 더 강화됐다. 올해 1분기 순현금은 1조2802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1906억원 증가했고 별도 기준 부채비율은 66.6%까지 낮아졌다. PF 리스크와 유동성 우려가 건설업계를 짓누르는 상황에서도 업계 최고 수준의 재무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 부회장이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경영 키워드는 안전이다. 그는 올해 신년사에서 "안전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중대재해 예방을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닌 기업 생존의 조건으로 바라본 셈이다.
DL이앤씨는 DL건설과 함께 ‘DL안전보건협의체’를 운영하며 그룹 차원의 안전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전 현장에 통합 스마트 안전관제 플랫폼을 도입했고 CCTV 통합관제 시스템도 구축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AI 자동번역 안전교육도 시행하고 있다. 안전을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시스템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조치들이다.
실적 회복과 안전경영 기반 구축 이후 박 부회장이 그리고 있는 미래는 ‘에너지 디벨로퍼’다. 건설 경기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주택 중심 사업구조에서 벗어나 소형모듈원전(SMR), 탄소포집·활용·저장(CCUS), 수소, 데이터센터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미국 엑스에너지와의 SMR 협력은 단순 EPC 사업자를 넘어 미래 에너지 산업의 전략적 파트너로 도약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자회사 카본코를 중심으로 추진하는 CCUS 사업 역시 탄소중립 시대를 겨냥한 핵심 성장동력이다. 캐나다 블루 암모니아 프로젝트와 국내 탄소 저장 국책과제 참여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필리핀 전력시장과 중동 재건 사업까지 더해지면서 DL이앤씨는 건설사를 넘어 에너지·인프라 개발 기업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박 부회장이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주택 경기 회복 지연과 플랜트 수주 경쟁 심화는 여전히 부담이다. 토목 부문 원가율 개선도 더 필요하다. SMR과 CCUS 사업 역시 가시적인 수익 창출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안전사고를 줄이고 무재해 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실적 개선만큼 중요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박 부회장의 첫 100일은 수익성을 회복한 시간이었다. 영업이익과 현금흐름을 되살렸고 조직에 수익성과 안전 중심 문화를 다시 심었다. 그러나 다음 100일은 다르다. 압구정5구역 패배 이후 정비사업 경쟁력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 또 SMR과 CCUS 등도 실제 수주와 이익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뿐 아니다. 무엇보다 안전사고 없는 현장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도 있다. 위기관리 전문가라는 평가를 넘어 미래를 만드는 경영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박 부회장의 다음 행보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