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타임즈뉴스 = 서연옥 기자] 식품업계 세대교체의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한때 오너 후계자들은 생산과 영업, 관리 조직을 두루 거치며 경영 감각을 익혔다. 하지만 최근에는 글로벌 사업과 미래 전략, 신사업, 인수합병(M&A)처럼 기업의 향후 방향을 좌우하는 핵심 영역에 오너 3세들이 전면 배치되는 등 승계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 단순히 후계 구도를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특정 과제를 맡기고 결과로 역량을 검증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는 모습이다.
이 변화는 식품기업들이 마주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내수 시장은 성장 한계가 뚜렷해졌고 K푸드 경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단순 수출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지 생산과 유통망 확보, 브랜드 경쟁력, 미래 먹거리 발굴까지 동시에 요구되는 환경이다.
K푸드 경쟁이 제품 판매를 넘어 현지 브랜드·유통·생산 역량 경쟁으로 옮겨가면서 식품기업들도 조직과 리더십 구조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업계가 오너 3세를 단순한 후계자가 아닌 ‘사업 책임자’로 세우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식품업계에서는 최근 식품기업 오너 3세들의 역할을 크게 ▲글로벌 확장형 ▲미래사업·신사업형 ▲투자·M&A형으로 구분한다. 과거가 경영 수업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기업별 전략 과제를 중심으로 역할이 나뉘는 구조다. 승계보다 책임 경영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글로벌 확장형 리더십이다. 해외 시장이 성장의 핵심 무대로 떠오르면서 오너 3세들도 글로벌 사업 최전선에 배치되고 있다. 농심의 신상열 부사장이 대표적이다. 신동원 회장의 장남인 신 부사장은 미래사업실장을 맡아 글로벌 전략과 신사업, 투자 업무를 총괄한다. 미국·캐나다 법인의 지주회사인 농심홀딩스 아메리카 임원에 이어 최근에는 중국 사업을 총괄하는 홍콩 법인 임원까지 맡으며 북미와 중화권 시장을 동시에 챙기고 있다.
농심의 ‘비전 2030’ 역시 글로벌 전략에 방점이 찍혀 있다. 2030년까지 매출 7조3000억원, 해외 매출 비중 60% 이상, 영업이익률 10% 달성이 목표다. 단순한 수출 확대가 아니다. 생산과 유통, 브랜드 전략 전반을 다시 설계하는 작업이다. 신 부사장은 이 과정에서 글로벌 사업 확대와 장기 성장 전략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빙그레의 김동만 사장도 글로벌 확장형에 속한다. 김호연 회장의 차남인 김 사장은 해태아이스크림 흡수합병 이후 해외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장남 김동환 사장이 본업을, 김동만 사장이 해외사업을 맡는 역할 분담 구조가 자리 잡는 양상이다.
빙그레가 김 사장에게 해외사업을 맡긴 이유도 분명하다. 국내 빙과·유제품 시장은 이미 성장 여력이 제한적이다. 메로나와 바나나맛우유 같은 대표 브랜드의 해외 확장이 향후 성장성과 직결되는 만큼 글로벌 유통과 마케팅 경험이 중요해졌다. 미국 유학과 이커머스, 물류 경험을 두루 갖춘 김 사장의 이력이 주목받는 배경이다.
SPC그룹 역시 글로벌 사업을 오너가 핵심 역할로 두고 있다. 허영인 회장의 장남 허진수 부회장은 파리바게뜨 글로벌BU를 맡아 북미와 동남아 생산·물류 거점 확대를 이끌었다. 해외 프랜차이즈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 SPC 성장 전략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허 부회장은 단순 해외사업 관리자가 아니라 SPC 글로벌 전략의 중심축으로 평가된다.
반면 미래사업·신사업형 리더십은 기존 식품사업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리온 담서원 부사장이 대표 사례다. 담철곤 회장의 장남인 담 부사장은 최근 신설된 전략경영본부 수장을 맡았다. 전략경영본부는 신규사업과 해외사업, 경영지원, CSR 기능을 통합한 조직으로 중장기 전략과 미래사업을 총괄한다.
식품업계가 담 부사장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 지원 조직이 아니라 그룹의 ‘다음 성장축’을 설계하는 자리를 맡았기 때문이다. 오리온은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초코파이 등 장수 브랜드 의존도가 높고, 중국 경쟁 심화와 국내 제과 시장 정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담 부사장 앞에 놓인 과제는 분명하다. 글로벌 사업 재편과 바이오다. 오리온은 지난해 리가켐바이오 지분 25.7%를 인수하며 바이오를 제2 성장축으로 삼겠다는 전략을 공식화했다. 담 부사장은 인수 과정에 참여했고 현재 리가켐바이오 사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직 바이오 사업이 투자 단계에 머물러 있는 만큼 향후 성과가 담 부사장의 경영 역량을 평가할 핵심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삼양식품 전병우 전무 역시 미래사업형 리더십으로 꼽힌다. 김정수 회장의 장남인 전 전무는 불닭 브랜드 글로벌 프로젝트와 중국 자싱공장 설립 과정에 참여한 데 이어 현재는 삼양라운드스퀘어에서 미래전략과 신사업을 맡고 있다.
불닭의 성공은 삼양식품 성장의 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불닭 이후’라는 숙제도 남겼다. 전 전무가 식물성 헬스케어 브랜드 ‘펄스랩’을 중심으로 건기식과 음료, 간편식, 소스 사업 확대에 힘을 싣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일 히트 브랜드 의존도를 낮추고 지속 가능한 성장 구조를 만드는 일이 그의 핵심 과제다.
CJ의 이선호 미래기획그룹장도 같은 축에 놓여 있다. 이재현 회장의 장남인 이 그룹장은 미래기획그룹을 통해 식품·바이오·콘텐츠를 연결하는 미래 포트폴리오와 디지털 전환 전략을 맡고 있다. 기존 사업 운영보다 미래 산업 구조를 설계하는 역할에 가깝다.
세 번째 축은 투자·M&A형 리더십이다. 기업 인수와 사업 재편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역할이다. 하림그룹 김준영 팬오션 상무보가 대표적이다. 김홍국 회장의 장남인 김 상무보는 NS홈쇼핑의 홈플러스익스프레스 인수와 팬오션의 해운 자산 인수 과정에 관여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특히 홈플러스익스프레스 인수는 단순 투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림은 식품 제조와 홈쇼핑 채널을 보유하고 있지만 전국 단위 오프라인 유통망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인수가 마무리되면 신선식품과 HMR, 축산·가공식품을 연결하는 유통 시너지 확보가 가능하다. 김 상무보에게는 첫 대형 M&A 성과이자 경영 능력을 입증할 시험무대가 될 전망이다.
반면 오뚜기는 비교적 신중한 길을 택하고 있다. 함영준 회장의 장남 함윤식 부장은 아직 임원에 오르지 않은 채 마케팅과 전략, 생산·경영관리 부문을 거치며 실무 경험을 쌓고 있다. 전면 배치보다 현장 경험 축적에 무게를 둔 방식이다.
식품업계 세대교체는 더 이상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가 후계자인가보다 어떤 사업을 맡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글로벌 확장과 미래사업, 투자·M&A라는 서로 다른 과제가 오너 3세의 역할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승계 과정 자체가 관심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사업을 맡아 어떤 성과를 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오너 3세들도 결국 글로벌 실적과 신사업 성과로 시장 신뢰를 확보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