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타임즈뉴스 = 허성미 기자] 국내 대기업 순위표가 달라지고 있다. 예전처럼 철강과 정유, 건설 등 전통 제조업이 상위권 이동을 주도하던 경향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반도체와 방산, 배터리 산업 재편이 기업 외형 변화까지 흔들고 있다. 한때 미래 산업으로만 여겨졌던 분야들이 실제 매출 순위까지 바꾸기 시작한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SK하이닉스다. AI 서버 확대와 함께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SK하이닉스는 처음으로 국내 매출 상위 5위권에 진입했다. 글로벌 방산 시장 확대 수혜를 입은 한화는 단숨에 상위권으로 뛰어올랐다. SK그룹 리밸런싱을 진행한 SK온 역시 처음으로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단순 업황 회복보다 어떤 산업이 미래 투자 중심에 서 있느냐가 기업 외형과 순위를 좌우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6일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발표한 ‘2025년 매출 기준 국내 500대 기업’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500대 기업 전체 매출은 4305조3610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4110조8281억원)보다 4.7% 증가한 규모다. 조사 대상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과 금융통계정보시스템,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 시스템 등에 재무정보를 공개한 국내 기업이다. 매출은 연결 기준으로 산정했고 지주사와 지배기업은 개별 기준을 적용했다.
500대 기업 진입 기준도 더 높아졌다. 지난해 매출 하한선은 1조4026억원으로 전년보다 733억원(5.5%) 상승했다. 경기 둔화 국면에서도 상위 기업 중심 시장 집중 현상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업계에서는 중견기업과 대기업 간 체급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상위권은 여전히 견고했다. 삼성전자는 매출 333조6059억원으로 1위를 유지했다. 전년 대비 10.9% 증가한 규모로 역대 최대 매출 기록이다. AI 서버 투자 확대와 메모리 업황 회복 흐름이 실적 반등을 이끌었다.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숨 고르기에 들어갔던 삼성전자도 다시 성장 궤도에 올라서는 분위기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각각 186조2545억원, 114조1409억원의 매출로 나란히 2·3위를 기록했다. 두 회사 합산 매출은 처음으로 300조원을 넘어섰다. 전기차 시장 성장 속도가 다소 둔화됐지만 하이브리드차 판매 확대와 고수익 차종 중심 전략이 실적 방어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전력공사는 97조4293억원으로 4위를 유지했다. 상위 1~4위는 전년과 동일했다.
순위표 변화는 5위권부터 뚜렷했다. 가장 눈에 띄는 기업은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매출 97조1467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7위에서 5위로 올라섰다. AI 반도체 핵심 메모리인 HBM 수요 확대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생성형 AI 경쟁 속에서 데이터센터와 AI 서버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연산 처리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 수요도 함께 급증했다. HBM 시장 주도권을 확보한 SK하이닉스 실적이 빠르게 개선된 이유다. 메모리 반도체가 단순 경기 민감 업종에서 AI 인프라 핵심 산업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500대 기업 순위표에도 AI 투자 경쟁의 온도가 반영되기 시작한 셈이다.

실제 수익성 개선 폭도 컸다. CEO스코어가 앞서 발표한 상장사 실적 분석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47조2063억원으로 전년 대비 101.2% 증가했다. 국내 상장사 가운데 가장 큰 증가 폭이다. 업계에서는 HBM 선점 효과가 단순 실적 개선을 넘어 기업 위상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방산 산업의 존재감 확대 역시 이번 순위 변화에서 빼놓기 어렵다. 한화는 매출 74조7854억원으로 전년 10위에서 7위로 세 계단 상승했다. 중동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방산 수출 확대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성장세가 외형 확대를 이끌었다.
특히 글로벌 지정학적 긴장이 장기화되면서 각국 국방비 확대 흐름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방산이 제한적인 내수 산업에 가까웠다면 최근에는 수출 중심 산업으로 체질이 달라지는 분위기다. 실제 K-방산은 조선·배터리와 함께 한국 제조업의 새로운 수출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화가 최근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지분 확대에 나선 것도 같은 흐름으로 해석된다. 발사체와 위성, 항공·방산 기술을 하나의 밸류체인으로 묶어 우주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한화가 방산 기업을 넘어 우주·에너지·방산 복합 산업 그룹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SK온의 상승세가 눈길을 끈다. SK온은 지난해 60위에서 올해 9위로 급등하며 처음으로 ‘톱10’에 진입했다. SK그룹 리밸런싱 전략에 따라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SK엔텀, SK엔무브 등을 잇달아 합병하면서 외형이 커진 영향이다.
최근 재계 순위는 단순 실적보다 사업 재편 속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위기다. 실제 주요 그룹들은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AI와 배터리, 방산, 에너지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다시 짜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이제는 얼마나 벌었느냐보다 어떤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느냐가 순위를 바꾸고 있다는 의미다.
순위 상승 폭이 가장 컸던 기업은 SK이노베이션이다. SK이노베이션은 356위에서 166위로 무려 190계단이나 뛰어 올랐다. 배당금 수익 증가 영향으로 매출 규모가 급증한 결과다. 원자재 가격 상승 흐름을 탄 금 거래·에너지·해운 계열 기업들도 순위가 큰 폭으로 뛰었다.
반면 철강과 건설, 일부 소재 업종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POSCO홀딩스는 163계단 떨어지며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DL건설과 에코프로이엠, 한일시멘트 등도 업황 둔화와 수익성 악화 영향으로 순위가 밀렸다. 특히 건설업은 부동산 경기 침체 장기화와 공사비 부담이 겹치면서 외형 성장 여력이 둔화되는 변화가 뚜렷했다.
새롭게 500대 기업에 진입한 기업은 35곳이었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와 소노인터내셔널은 각각 아워홈과 티웨이항공 인수 효과로 외형을 키웠다. 무신사와 메가존클라우드, 쿠팡페이, 에이피알 등 플랫폼·신산업 기업들도 '톱 500'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제조업 중심 순위표 안으로 플랫폼과 클라우드, 핀테크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도 눈에 띄는 변화다.
업종별로는 자동차·부품 기업이 49곳으로 가장 많았고 IT·전기전자와 유통업이 뒤를 이었다. 다만 최근 순위 변화 흐름만 놓고 보면 AI 반도체와 방산, 배터리, 플랫폼 산업 쪽으로 무게 중심이 빠르게 이동했다.















